니체는 인간이 올바른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겪어야 한다고 한다.
첫 번째 변화: 낙타
첫 번째 변화는 낙타다.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는 강력한 정신, 인내심 많은 정신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다. 그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인내심 많은 낙타는 무겁기 그지없는 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짐을 가득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
여기서 말하는 낙타는 중력의 정신이고 당위의 정신이다. 이는 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사회적 규범이며 '너는 해야 한다'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며 정신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비늘 짐승으로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금빛으로 빛난다. 천 년 묵은 가치가 이 비늘들에서 빛난다. 그리하여 모든 용들 가운데서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들의 모든 가치, 그것은 나에게서 빛난다."
즉,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우리가 이미 만들어진 규범과 관습의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낙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낙타는 순종의 대명사로 짐을 거부하지 않는다. 낙타는 규범과 관습의 짐을 지고서 사막이라는 현실을 걸어간다. 사회초년생이나 직장인을 낙타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먼저 낙타가 되는 것이 인간의 첫 번째 변화라고 한다.
두 번째 변화: 사자
두 번째 변화는 사자다.
위에서 언급한 번쩍이는 황금빛 용의 너는 해야 한다!라는 외침에 사자는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정신은 여기에서 그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 최후의 신과 대적하려 하며, 승리를 위해 이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이려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사자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사자는 자유를 지향하며, 모든 쇠사슬을 끊는 정신이다. 저기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를 지배하고 즐기는 것이 사자다. 떠나는 사람은 떠나게 하고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 외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생각도 요구된다.
금발의 야수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낙타의 정신이 짐을 짊어지는 정신이었다면, 사자의 정신은 짐을 벗어던지는 정신이다. 짊어져야 할 짐이 필요할 때는 짐을 찾아 떠나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 짐이 더 이상 짐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과감하게 벗어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또 짐을 짊어진다(=출근한다). 나는 그동안 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단 한 번도 휴학하지 않았고 논스톱으로 졸업하고 일하는 것도 쉬지 않았으며 실내 건축기사도 따고 건축사도 따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다 했다.
이렇게 요구하는 것들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내 안에서 화가났다. 미래가 없는 현실과 이렇게 평생 일만하다 버려지는 현실에 이렇게 가다가는 진짜 인생 종치겧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독서를 통해 이러한 니체의 사자 이야기 등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오늘도 사자고 나발이고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누군가 막상 등에 짐을 얹어주면 잘 길들여진 낙타처럼 반사적으로 일어나 또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죽은 자의 눈빛으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끊임없이 등에 주어지는 짐과, 그 짐을 계속 나르다가 어딘가는 이상이 생긴 선배 낙타들을 볼 때면, 이미 길들여져 야생성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생기 없는 썩은 동태 눈을 볼 때면, 자네 잘 부탁해란 말을 듣고 누가 어깨를 탁탁 두들기면 빌딩 옥상에서 몸이라도 던질 듯한 타입의 사람을 볼 때면, 죽음 앞에 후회 없을 내 자신을 생각할 때면 난 분명히 후회할 것만 같다.
이것은 어떤 움직임으로 삶을 살아가느냐에 대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예전 90년대 한국처럼 평생 직장의 개념도 사라지고, 40대 후반 50대에 잘리는 상사들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기로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다.
세 번째 변화 : 아이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니체는 낙타에서 사자로의 변화 그 다음을 얘기한다. 그것은 세 번째 변화인 '아이'의 단계이다. 몇 문단 밖에 안되어 짧긴하지만, 아이는 무엇이든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낙타가 의무를 짊어지고, 사자가 그 의무에 저항한다면, 아이는 그 너머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한다.
삶의 기로에서 단순히 낙타냐 사자냐의 이분법적 선택이 아니라, 두 단계를 모두 거친 후에 창조적 아이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성실히 짐을 짊어진 낙타로서의 나의 경험과, 앞으로 그 짐을 내려놓을 용기를 가진 사자로서의 나의 가능성은 모두 소중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든 그것이 진정 나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습이나 타인의 기대에 따르는 것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선택 이후에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창조하는 '아이'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자기 초월의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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